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중국-베트남 전쟁 (문단 편집) ==== 중국군 ==== 중국군은 동쪽에서는 광저우군구(사령관 [[쉬스유]])가 중심이 되어 서쪽에서는 쿤밍군구(사령관 [[양더즈]])가 주력으로 참전했다. 최종적으로는 5개 군[* 당시 중국의 "군"은 한국군의 [[군단]]에 해당했다.] 29개 사단을 동원했다. 중국군은 초기에 6만여 명의 병력으로 전쟁을 시작해 최종적으로는 약 20만명 정도의 병력을 동원하였고 100여 기의 항공기, [[59식 전차]], [[62식 전차]], [[63식 전차]] 등을 포함한 400여 대의 [[전차]] 및 [[63식 장갑차]] 등의 기갑전력을 투입하였다. 하지만 중국군은 수는 많았을지언정 [[문화대혁명]]의 여파에 직통으로 얻어맞은 여파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펑더화이]], [[뤄루이칭]], [[양상쿤]]으로 대표되는 인민해방군의 현대화론자들이 주자파 반동으로 몰려 참혹하게 숙청당한 후 인민해방군의 현대화는 60년대 중반 이후 전혀 진전이 없었으며 1971년 [[9.13 사건]] 당시에는 공군의 야간전투 자체가 불가능하여 소련으로 도주하는 [[린뱌오]] 일가를 먼 산 보듯이 바라봐야만 했다. 거기에 문혁으로 고급장성들이 대대적으로 숙청당하고 1967년 [[7.20 사건]] 이후로 군부 자체가 반혁명 세력으로 몰려 [[장칭]]을 필두로 농민과 노동자를 무장시켜 반동 인민해방군을 대체해야 한다는 급진적인 주장이 나오던 판이었다. 장교 몇 명이 당했을 뿐 군에는 피해가 없다는 주장이 있는데 총참모부 정치부주임, 총후근부 부장, 군구의 사령과 부사령과 정치위원 등의 고급장교들을 동네 학생 양아치들이 임의로 잡아가서 죽도록 패거나 아예 때려죽이는 일이 비일비재했는데 군의 지휘계통이라는 것이 남아날 리가 없었다. 1967년 장칭의 특명을 받은 베이징의 [[홍위병]]들이 사천성까지 쳐들어가서 펑더화이를 납치한 사건이 발생했을 때 [[저우언라이]] 총리는 성도군구를 이용하여 펑더화이를 구출하려고 했으나 성도군구의 군구사령과 정치부 주임이 모조리 홍위병에게 조리돌림당하고 있어서 끝내 펑더화이 구출에 실패할 정도였다. 겨우 1967년의 3월 흑풍을 비롯하여 군의 홍위병 진압을 두고 군의 전투력이 유지되었다는 주장도 있지만 애초에 약탈한 총기와 사제 병기로 무장한 미성년자 민간인들을 중화기로 무장한 정규군이 진압하지 못한다면 그건 당장 군복 벗고 집에 돌아가야할 일이지 그거 했다고 전투력이 보존되었다고 주장할 일이 아니다. 이렇게 원수들도 죽어나가던 실정인데 그 아래 부하들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숙청된 원수들인 [[허룽(군인)|허룽]], [[펑더화이]], [[천이]] 인맥으로 찍힌 군인들은 모조리 문화대혁명 때 [[홍위병]]들에게 구타당하고 수용소나 사설 감방에 갇혀 학대당했다. 덩샤오핑 집권 후 이들은 풀려나기 시작했으나 행정처리 미숙으로 석방이 늦어지거나 수용소에서 혹사와 학대 때문에 군에 복귀하기보다는 장기간 요양해야 할 처지의 사람들이 많았다. 또 이 시절에 군대의 베테랑 병사나 장교들도 사라졌는데 [[6.25 전쟁]], 중국-인도 국경분쟁 때 참전했던 베테랑들이 홍위병의 구타를 당해 죽거나 감방에 가거나 산골에 끌려가 삽질을 하고 있었고[* [[문화대혁명]]의 타겟은 주로 지식인들이었으나 나중에는 군인들도 당하기 시작하면서 피해가 많았다.] 신병들은 군사 훈련보다는 [[마오쩌둥 어록]]을 외우는 데 더 시간을 할애하고 있었다. 실제로 당시에 마오식 정신주의의 폐해 때문에 군사훈련보다는 사상훈련이 더 강조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전력이 향상될리 만무했다. 또 1972년 [[린뱌오]]가 꾸민 쿠데타의 여파인 [[571 공정]] 때문에 린뱌오와 그 아들 린리궈의 개인 왕국이었던 공군 수뇌부가 연루 유무에 관계없이 대거 체포되어 감옥에 갔다가 4인방 몰락 후에야 겨우 하나 둘씩 복귀했기 때문에 침공 작전에서 필수적인 공군도 상태가 좋지 않았다. 일단 기술적으로도 뒤떨어져있는데다가, 지휘관들도 수 년간 감옥 생활을 하고 왔기 때문에 역시 지휘에 감이 매우 떨어져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중국이 전혀 유리한 점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중국이 베트남 전쟁 기간 대규모 인력을 파견하여 군사원조를 해 주면서 중국의 군사고문단으로 베트남에 갔다 왔던 중국군 인력들이 북베트남 곳곳의 지형이나 엄폐물, 방공망 등의 위치를 파악하고 있었다. 또 1960년대 말부터 고조된 소련과의 긴장 상황 때문에 중국은 소련군의 침공에 대비한 준비를 계속해 왔다. 이때 [[중일전쟁]]의 전훈을 살려서 중국 영내 깊숙한 지역이자 베트남 바로 위쪽의 쓰촨성에 대규모 군수공업단지를 조성하고 대규모 군수물자를 비축해 놓고는 있었다. 거기에 세계 조류에는 다소 뒤떨어져 있었지만 중국 자체 기술로 만든 여러 무기가 개발되어 나왔다. 문제는 이런 것은 방어전을 위한 것이었고 자국 영내에서 싸우기 위한 것이었지 베트남과의 충돌을 상정한 것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중월전쟁이 시작되던 시점에도 [[예젠잉]]을 비롯한 중국 군부의 실세들은 문혁으로 정지된 중국군의 현대화 사업에 사활을 걸고 있었으며 군축, 장교의 정예화, 무기의 현대화를 위해 막대한 예산을 책정하였으나 이 모든 것이 베트남과의 전쟁을 위해 취소되자 [[덩샤오핑]]에게 큰 불만을 품고 있었다. 즉 꼬붕인 줄 알았던 나라가 갑자기 적이 되니 [[예방전쟁|한 대 때려서 개기지 못하게 만들긴 해야겠는데]] 미제 방검복을 입고 있는 꼬마를 상대로 팔에 깁스를 한 채 '''돌칼''' 밖에 꺼낼 수 없는 상황이었던 게 문제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